마우리치오 카텔란과 현대카드가 협업해 내놓은 신용카드. 카드 오른쪽 상단과 가운데에 카텔란의 대표작 ‘코미디언’의 덕테이프를 붙인 바나나를 찾아볼 수 있다. 카드 뒷면에도 같은 바나나 문양의 보안용 홀로그램이 붙어 있다.
624만달러(약 86억7360만원)짜리 바나나가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섰다.
마우리치오 카텔란(66)의 대표작 ‘코미디언(Comedian)’ 속 바나나가 신용카드 위에 그려졌다. 바나나 하나를 덕테이프로 벽에 붙인 이 작품은 2024년 11월 뉴욕 소더비에서 624만달러(약 87억원)에 낙찰됐다. 구매자인 암호화폐 사업가 저스틴 선은 낙찰 후 이 바나나를 먹는 퍼포먼스까지 벌이며 화제를 더했다. 말 그대로 ‘코미디’였던 셈이다. 이번엔 카텔란이 현대카드와 협업해 만든 신용카드에서 바나나가 위조 방지용 홀로그램으로 다시 태어났다. 가치와 가격을 조롱하던 그 바나나가 이제는 결제를 지켜주는 보안 장치가 된 것이다. ‘코미디언’의 완성일까, 아이러니한 배신일까. 카텔란은 최근 본지와 서면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든다”며 “기묘한 이력을 거쳐온 바나나가 마침내 직장을 하나 갖게 됐다”고 했다.
이번 협업은 가상의 국가 ‘Republic of Hyundai Card(현대카드공화국)’라는 콘셉트에서 출발했다. 카드를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처럼 보이게 만들고, 자신의 작품에 등장했던 박제 말과 타조로 국장(國章)을 꾸몄다. 사용자는 자기 사진 대신 카텔란의 얼굴을 변주한 6명의 인공지능(AI) 캐릭터 사진을 넣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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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카드가 예술인지 디자인인지 광고인지 묻자 그는 굳이 선을 긋지 않으며 “흥미로운 순간은 그 범주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고 했다. 그는 경계를 넘어서기보다, 그 경계가 얼마나 허술한지를 들춰내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카텔란의 대표작 ‘코미디언’의 덕테이프를 붙인 바나나
신용카드라는 물건에 끌린 건 ‘결제’라는 일상적 행위를 잠깐 어긋나게 할 수 있어서였다. 신분증을 닮은 카드를 상。이나 식당에서 건넸을 때 상대가 “신분증을 주셨네요”라고 착각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는 “그 작은 오해가 매력적이었다. 완전히 평범한 몸짓이 갑자기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늘 무심코 꺼내던 카드가 몇 초 동안 낯선 반응과 대화를 만드는 장치가 되는 셈이다.
카텔란은 운석에 맞아 쓰러진 교황을 묘사한 ‘아홉 번째 시간(La Nona Ora)’, 18K 금 변기 ‘아메리카(America)’ 등을 통해 권력과 종교, 부와 금기 같은 무거운 주제를 웃음과 불편함이 맞닿는 지。에 놓아왔다. ‘미술계의 광대’라는 별명이 따라붙었지만, 올해 타임지의 ‘TIME100 Art’에 이름을 올릴 만큼 영향력은 크다.
2011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카텔란의 회고전 ‘All’ 전경. 카텔란은 1989년 이후 만든 작품 약 130.을 미술관의 로툰다(원형) 천장에서 한꺼번에 매달았다. 연대와 위계를 지운 채 자신의 작품 세계를 거대한 설치처럼 펼쳐놓은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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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베를린 노이에 나치오날갤러리에서 개막한 개인전에서도 순수와 폭력, 역사적 기억 같은 묵직한 주제를 붙들었다. 반응은 엇갈렸다. 일부 비평은 “익숙해진 ‘장난꾸러기’ 이미지가 작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도발이 예상되는 작가는 여전히 관객을 놀라게 할 수 있을까. 그는 “훨씬 어려워졌다. 사람들은 아침을 먹기도 전에 (뉴스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미 모든 것을 봐버린다”며 “10초 동안 충격을 주고 사라지는 것보다 나중에 다시 돌아오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고 했다. 그가 여전히 즐겨 여는 문은 ‘유머’다. 그는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 문을 통과한다”며 “일단 안으로 들어오면 처음부터 진지하게 말했다면 피했을지도 모를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했다.
카텔란의 가장 큰 모순은 그 자신이다. 자본주의와 미술 시장을 조롱해 온 작가로 읽히지만, 동시에 시장이 사랑하는 스타 작가다. “시스템을 조롱하던 사람이 이제 시스템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어쩌면 시스템에도 유머 감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이어 “내 작업이 단순히 자본주의나 미술 시장에 반대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나는 모순에 관심이 있고, 시스템 안에는 모순이 가득하다”고 했다.
‘코미디언’도 그 모순의 증거다. 자본주의를 향한 농담이었을까, 자본주의가 해준 최고의 광고였을까. 그는 “아마 후자일 것이다. 거의 돈이 들지 않는 바나나가 아주 비싼 삶을 살게 됐다. 가치에 농담을 던졌더니, 가치가 대답해 온 것”이라고 했다. 자본주의는 놀림받았다고 상처받는 대신, 그 조롱에 87억원짜리 가격표를 붙였다. 카텔란이야말로 자본주의 시대가 만들어낸 진정한 ‘코미디언’인지도 모른다.
고 했다. 늘 무심